어느덧 인간이 가장 배가 고파진다는 오후 7시가 되었다. 배가 고프다. 그런데 수원역 앞에서 우연히 들린 책방에서 여럿 지르고 나오는 바람에 지갑에 돈은 다 탈출하고 없다. 물가도 오르고 집값도 오르고 고깃값도 오르고 뒷집 철수네 아버지 직책도 오르고 내 월급만 빼고 다 올라가는 세상이다. 이럴 때에는 오직 하나 짜장면 값만은 4천원대에서 더 올라가지 않는 중국요리가 최고다.
마침 예전에 맛집이라면 추어탕이든 백숙집이든 곱창집이든 무규칙적으로 찾아다니는 것이 인생사 낙이 된 친구에게 "상록수역 앞에 쓰부라고 죽이는 중국집이 하나 있다"는 제보를 들은 바 있었다. 호텔 1층이라니 상록수역 앞 호텔촌 어드메 있겠지 하고 어림짐작한 필자는 상록수역에서 내렸다가 주린 배를 붙잡고 괴로워해야만 했다. 지나가는 행인 여럿 붙잡고 물어물어 찾아가 보니 상록수역에서 떨어져도 한참 떨어진 민가 한가운데에 위치한 것이 아닌가.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핸드폰에 내비게이터가 설치된 외장메모리를 넣고 나오지 않은 것이 이렇게 뒤통수를 칠 줄이야...

일요일 저녁이라 그런지 가게는 굉장히 한산했다. 짐을 풀고 우선 깐풍기 1인분을 (이미 검색해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쓰부에서는 요리 카테고리의 음식도 1인분씩 시킬 수 있다. 돈은 없고 혀는 고픈 필자같은 사람에게 딱이다) 시키자 곧 시원한 차를 내주셨다. 사실 한국에 있는 중국음식점에서 자스민차를 마시는 경험은 이번이 처음이었는데, 한국인의 입맛에 맞게 고치신 것인지 중국여행 당시 지겹게 마셨던 대륙의 자스민차처럼 향이 진하지 않고 후두에 남는 듯 은은했다. 추상적인 느낌이 아니라 정말 연한 향기가 입 뒤쪽에서 오랫동안 느껴지는 신묘한 체험이었다. 오래 지나지 않아 주문한 깐풍기가 나왔다.

이거 신기하다. 야채 고명에선 소위 '불향'이라고 부르는 고소한 맛이 나는데 또 아삭거리는 느낌은 그대로 살아있다. 어쩐지 오픈형 주방에서 중국어 악센트가 얼핏얼핏 들리더라니... 얼큰한 소스가 끼얹어진 바삭한 튀김옷 속에는 살코기와 기름기가 적절히 섞인 닦고기가 자리하고 있다. 느끼하지 않으면서 적절히 기름진 것이 옆에 고량주 하나 따라놓고 함께 즐기면 딱일 것같다. 술을 즐기지 않는 필자도 이렇게 느꼈으니 술 좋아하시는 분들이야 오죽하랴. 앞에 같이 대작할 언니 한 분만 계셨어도. 에구, 한심한 청춘아.
데이트를 즐기는 남녀들이 한창 식사에 열을 올릴 시간대에 냄새나는 남정네가 혼자 자리잡고 들어앉아서 요리만 1인분 덜렁 시켜놓고 깨작대는 광경이 심히 청승맞아 보이셨던지 호쾌한 인상의 지배인님께서 말을 붙여 주셨다.
"식사는 뭘로 시키실 겁니까?"
"(당황한 나머지 잠시 말을 잊음)......예?"
"짬뽕 한번 추천드릴게요. 얼마전에 직접 개발한 건데 아주 자신있습니다."
" '끙, 해물국물 들어가면 다음날 뒤가 괴로운데...' 아, 예... ^^;(찐따같은 웃음)"
깊이깊이 숨겨왔던 필자의 찐따스러움이 만천하에 드러나는 참사였다. 지배인님께서도 필자의 찐따스러움에 질리셨는지 밖으로 나가버리시고, 나는 홀로 객석...이 아니라 자리에 앉아 깐풍기를 몇 점 깨작거리다가 간만에 제대로 된 만두를 먹어보고 싶은 마음에 짜장면 대신 군만두를 시켰다. 방금 전에 일어난 상황변화에 적응하지 못하고 등줄기를 흐르는 뻘쭘함에 애꿎은 자스민차만 들이켜고 있자니 어라, 군만두를 시켰는데 짜장면이 배달?

주문이 잘못 들어간 것이었다. 짜장면 시키려다가 군만두를 시켰더니 짜장면이 나오다니 두려운 독심술... 춘장의 고소한 향기에 끌린 필자가 그냥 이거 먹겠다고 선언하려던 찰나 직원분께서 주문서를 대조해보시고는 짜장면을 그대로 가져가 버리셨다. 춘장의 고소한 향기에 끌린(재차 강조) 필자는 에라, 이미 버린 몸 맛있는 거나 먹자! 하고 다시금 홀 안에 있던 모든 분들 앞에서 찐따 인증을 해버렸다. 오픈형 주방을 향해 "그 짜장면 다시 갖다 주세요!" 라고 외친 것이다. 그러나 버스 떠나간 뒤에 손 흔들지 말랬던가, 잘못 나온 짜장면은 이미 처분된 뒤였다. 눈물나게 철저한 위생관리였다. 한층 더 심각해진 뻘쭘함을 등에 업은 필자는 짜장면이 다시 나올 때까지 깐풍기와 함께 나온 무절임만 철근같이 씹어야만 했다.
그렇게 힘들게 받아든 짜장면은 또 한 번의 생쑈를 감내하고 먹을 가치가 있는 물건이었다. 메뉴판에 간짜장이 따로 없는 것이 좀 묘했는데, 딱 비벼놓고 보니 그 이유를 한방에 납득시키는 불향 가득한 고소함이 확 느껴졌다. 필시 진득한 춘장에 물 따위는 붓지 않는다는 주방장님의 의지이리라. 깊게 배어든 춘장맛이 가득한 야채는 그 자체로도 존재감을 팍팍 어필하고 있었고, 일하다가 짜장면 시켜서 먹을 때마다 빼놓고 먹는 고기마저 달큼한 육즙이 배어나오는 훌륭한 맛을 자랑했다. 탱탱한 면발은 굳이 필설로 설명할 필요가 없는 맛집의 기본소양. 지배인님 야채가 면이랑 나와바리 놓고 싸우고 있는데 어떡하죠?

지금까지 가장 맛있게 먹었던 짜장면은 영월에서 우연히 들렸던 영빈관 옆집 대려도에서 먹은 짜장면이었는데, 여기 짜장면은 소위 말하는 옛날짜장식의 질펀한 춘장을 사용했던 것 같다. 춘장에 점도가 별로 없었다. 쓰부 짜장면이 옛날짜장이었거나 대려도 짜장면이 간짜장이었다면 둘이 1등 자리 놓고 내 머릿속에서 피터지게 싸웠을텐데 참 다행이다. 생각해보니 저번에 대려도에서 탕짜면 시켰을때도 짬짜면 나오던데...? 맛있는 집에서는 가끔씩 주문이 잘못 들어가고 그러나 보다.

짜장면은 일찌감치 다 먹어치우고 밑에 깔린 야채까지 열심히 긁어먹고 있는 필자를 발견하신 지배인님께서 다시 말을 붙여주셨다.
"아이구, 짬뽕 한번 주문해 보시랬더니만..."
"아, 제가 해물이 들어가면 속이 좀... ^^;;"
"아하, 그러셨구나. 그럼 국물이라도 좀 드셔보세요. 닭육수라 괜찮을거예요. 서비스로 하나 내드릴게요."
어...어?
"...네?"
"서비스예요, 서비스. 사진만 한 컷 예쁘게 찍어주세요"
이번에야말로 순간적인 상황변화에 적응하지 못하고 얼어버렸다.
'나 포스팅한다고 어필한 적 없는데... 설마 아까 깐풍기 찍을 때 눈여겨보셨나?'
'요리가 맛있어서 생각없이 찍은건데 포스팅 목적으로 온 줄 아셨나?'
'아오, 글 길게 쓴 것도 오래돼가지고 포스팅하려면 힘들텐데...'
아시는 분은 알고 계실 3인조 포스팅녀 먹튀사건 이후로 음식쪽 포스팅하시는 분들이 곤란해졌다는 얘기는 주워들었어도 설마 내가 그 꼴이 날 줄은 몰랐다. 그것도 다른 의미로. 그나마 서이추 몇 개 되어있던 네이버 블로그도 박살낸게 벌써 1년 전인데 이 일을 어찌하랴. 엇다, 조상님께서도 달리는 호랑이 위에 올라탔으면 갈기 꽉 붙잡고 갈데까지 가보라셨지. 기왕지사 지배인님이 서비스해주시는거 감사히 받고 포스팅이나 정성껏 하자는 심정으로 촬영 세팅을 다시 했다. (s5pro F2 -> std, dr확장 230%. 요사이 들어 느낀 거지만 F2모드는 실내에서 쓸 물건은 못 되는 것 같다. 자연광 아래에선 이렇게 좋은 게 또 없는데.)

아니 서비스로 내주신다더니 이게 지금 쭈꾸미에 조개에 홍합만 몇 마리야. 말문이 막혀서 직원님을 돌아보니 웃으시면서 "원래 이렇게 나와요" 하신다. 이걸 어쩌나 싶은 걱정은 뒤로 제치고 우선 사진을 한 장 찍으며 외양을 차근차근 살펴보았다. 바닥에 깔린 면 위로 소담스럽게 쌓인 해물들이 나 맛있다고 존재감 어필을 마구 하고 있는데 이 한심한 인생은 20몇년 살면서 아직도 해물이랑 안 맞는다. 해물요리 싫어하는 사람은 인생 손해보는 거라고 이탈리아 누가 그랬던 것 같은데...
속으로 피눈물을 흘리며 우선 야채를 아삭 씹어보았다. 음, 양파에서 단맛이 쫙 퍼진다. 주방장님의 야채 잡는 솜씨는 아까 깐풍기 야채고명 솜씨에서 확실히 느꼈다. 두번째로 국물을 한 숟갈 떠먹어보았다. 이걸론 부족하다. 대접을 들고 이미 앞서 먹은 요리로 80% 가까이 들어찬 뱃속에다가 국물을 다이렉트로 들이부었다.
혀로 맛을 보았다.
'어라? 이거 왜 짬뽕에서 해물칼국수 스멜이...'
목구멍으로 넘겼다.
'...아니라 영계백숙 국물맛이네?'
배로 들어갔다.
'매워!!!'
주워듣기로 한국 땅에서 자리잡은 짬뽕이란 요리는 본디 국물을 내기 위하여 닭육수를 사용하다가 가중되는 경제난에 시달린 주방장들이 재료비 절감을 목적으로 차츰 저렴한 해물, 그것도 더욱 저렴한 냉동오징어 뒷다리같은 부분으로 국물을 내기 시작했단다. 필자는 이 비릿한 해물향이 정말 싫기도 하고 몸에도 안 맞아서 항상 짜장면만을 시켜먹는데 이건 정말 뭐랄까... 돼지고기 육수를 쓴다던 영빈관의 짬뽕을 먹은 이후로 달라진 필자의 스탠스에 직격탄을 날리는, 국물까지 싹 들이키고 싶도록 만드는 멋진 요리였다.

짬뽕은 전국구 다섯손가락 안에 든다던 명성에 걸맞는 걸물이었지만 짜장면은 인간적으로 좀... 그랬다.


짬뽕국물을 정신없이 들이키면서 문득 중화액션요리만화 '철냄비 짱'을 떠올렸다. 작중 여주인공은 '요리는 마음' 이라는 신념으로 '요리는 승부'라는 믿음을 가진 괴물같은 실력을 가진 주인공과 몇 번이고 부딪치면서 주인공과 경쟁한다. 만화를 읽으면서 몇 번이고 험한 꼴을 당하면서도 주인공의 그릇된 믿음을 고치려고 노력하는 그 모습이 기억에 남았다.

이미 배는 한계까지 찼는데 먹기는 조금만 더, 조금만 더 먹고 싶다. 면이 들어갈 자리가 없어서 국물만 자꾸 들이키는 모습이 심히 걱정스러우셨던지 사모님께서 그만 드시는 게 좋지 않겠냐고 일러주셨다. 표정이 그렇게 위험해 보였나... 서비스로 내어주신 음식을 남기는 나쁜 행위보다 손님의 건강을 더 염려해주시는 마음씀씀이에 한번 더 감동한 필자는 자리에서 일어나 깊이 인사하고 집으로 가는 길을 나섰다.

위치 : 경기도 안산시 상록구 사동 1198-4 태평양관광호텔 1층
전화번호 : 031) 417-4325
홈페이지 주소 : http://blog.naver.com/songsajang34/
찾아가는 길 :



버스를 타고 찾아가려면 시청에서 상록수 방향으로 운행하는 22번 버스를 타고 '서원호텔 입구' 정류장에서 하차하면 바로 이 골목이 보인다. 55번 등 다른 노선도 있지만 이들은 자주 운행하지 않는다.




덧글
알렉세이 2011/08/22 22:32 # 답글
아하 쓰부는 한자로 사부(스승)을 말하는 거였군요.ㅋㅋ 근데 황비홍에서는 씨부~~에 가깝게 발음하던걸요?(웃음)짬뽕국물자체는 부드러움속에 묵직함이 느껴집니다. 짬뽕은 화끈한 불맛도 있으면 더 좋은데 그렇던가요?